* 안녕하세요, 특집 빌런입니다.

* 화이트데이 편하고 살짝 이어집니다.

* 초고주의














인간들은 정말 이상하다니까.

제갈량은 옥새 내부에 앉아 마음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렸다. 오늘은 들어오는 소원마다 꽃과 관련이 있었던 탓이다.

‘꼭 그 아이가 제 꽃을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그 사람에게서 꽃다발을 받고 싶어요.’

‘그 꽃을 준 게 제발 저라는 걸 들키지 않게 해주세요.’

물론 복권에 당첨되게 해 달라거나, 병이 낫게 해 달라는 둥 평상시와 다르지 않은 소원도 있었지만 어제부터 어수선할 정도로 꽃에 관련된 소원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한 달 전에는 사탕, 그 전에는 초콜릿이더니 이젠 또 뭔가 싶어서 알아보니 꽃을 주는 날이란 게 있었다.

연애란 좋아하는 사람끼리 마음이 통해 관계를 발전시키고 유지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사전에 적히지 않은 부가적인 사항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하여간 인간들이란. 제갈량은 가볍게 이를 물었다가 풀며 한숨을 쉬었다. 지난 며칠간 신경이 곤두서 있던 탓에 불평이 늘어난 기분이었다. 공손찬이 참가하는 포럼에서 비룡권 시연을 위해 유비가 며칠간 도원관을 비우고 나가 있어서 약간 심술이 난 탓이 컸다.

지난 밸런타인에는 유비에게 사람 머리 크기의 초콜릿을 받았다. 최대한의 사랑을 담아 먹을 수 있는 사이즈로 만들었다던 초콜릿을 먹느라 이틀간 소시지는 고사하고 물도 못 마셨다. 그래서 단 건 당분간 됐다고 했더니 화이트데이 때는 사탕을 준비 못 했다며 시무룩해하기에 남은 시럽을 이용해서 퍽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흐음.”

성가시기는 하지만 생각을 정리해보니 이벤트라는 게 꼭 나쁘지만도 않은 것 같군. 제갈량은 혼자 생각을 정리하며 잠시 해당 이벤트에 대해 조사해보기 시작했다.

유비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옥새 시스템의 대대적인 점검을 시작한 터라 며칠 더 자리를 지켜야겠지만, 그래도 아주 잠깐이라면 빠져나갔다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인간을 상대로 연애를 하니 인간의 룰에 맞춰드려야겠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제갈량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미소를 머금었다. 꽃을 받고 해죽해죽 웃을 유비의 얼굴을 떠올리자 이벤트니 뭐니 쓸모없다던 생각이 파도에 휩쓸려간 듯 사라졌다.





로즈데이에 대해서 어느 정도 체크를 마치고 난 뒤, 도원관 근처의 꽃집을 알아보던 중에 제갈량의 뇌리를 스치는 한마디가 있었다.

‘난 꽃집에서 파는 꽃은 좀 그래. 잘려서 불쌍하잖아.’

흰색과 붉은색 장미꽃 백 송이를 사각의 상자에 하트 모양으로 담아 선물과 함께 증정하는 호화 이벤트를 채택하기 직전이었다. 제갈량은 부채로 제 이마를 톡톡 치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어떤 건지는 안다. 제갈량 역시도 신선이다 보니 선계의 숲에 익숙하다. 식물의 뿌리를 잘라 장식용으로 쓰는 인간의 방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자연 상태에서라면 뿌리가 잘린 후에도 다시 돋아나기도 하지만, 인간이 날붙이를 이용해 일부러 자른 식물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모처럼의 이벤트인데 마음이 앞서는 바람에 하마터면 유비를 곤란하게 만들 뻔했다. 더 찾아보니 드라이플라워며 프리저브드 플라워라는 것도 나왔지만 이것도 제갈량이 보기에 유비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관둘까.

이것저것 걸리니 이벤트 챙기는 것 자체를 그만둘까 싶다가 퍼뜩 떠오른 건 서서의 화단이었다. 원래 유비의 화단이었는데, 서서가 함께 돌보기 시작한 뒤로 어째서인지 그렇게 부르게 된 곳. 그곳의 존재가 사사하는 바는 명확했다.

유비가 꽃을 아주 좋아한다는 것.

아무도 없는 옥새에서 제갈량은 혼자 한숨을 내쉬었다. 번거로움과 유비의 웃는 얼굴은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제갈량은 급히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세상을 지탱하는 비상한 신선의 머릿속은, 애인을 기쁘게 해줄 방법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공손찬과 유비가 국제무술포럼을 마치고 도원관에 돌아오던 날은 계절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뜨거웠다. 그래도 아직 반팔을 입고 다닐 정도는 아니지 않느냐고 하던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정오 전부터 오후까지 햇살은 뜨겁고 공기는 후덥지근했다.

모처럼 먼 곳까지 갔으니 당연히 선물을 사야 한다며 온갖 기념품에 특산품까지 사서 짊어지고 오느라 도원관에 도착했을 때 유비는 거의 드러눕다시피 했다.

“그러게 작작 사라니까.”

“하지만 줄 사람이 너무 많은데 어떡해.”

한 사람 것만 줄여도 그 짐 절반은 줄지 않냐? 그렇게 대꾸하려던 공손찬이 입을 다물었다. 그걸 굳이 쏘아붙이든 말든 달라지는 건 없기 때문이다.

“오늘은 푹 쉬어. 내일부터는 다시 정상적으로 도장 문 열어야 하니까.”

평소라면 이렇게 며칠 비우게 될 상황 같으면 상향에게 부탁했겠지만, 그녀 또한 이번 포럼의 참가자였기에 그럴 수도 없었다. 결국 관원들에게 공지하고 며칠간 문을 닫은 상태였다. 미축이 그럼 자기가 맡아 주겠다며 나섰지만 공손찬은 웃는 얼굴로 엉덩이를 걷어찼다.

“짐부터 정리하고 뻗어라.”

내버려두면 또 여행용 가방에서 선물만 쏙 뺀 뒤 며칠 지나서야 정리할 낌새를 눈치채고 공손찬이 선수를 쳤다. 그 말에 유비가 눈을 접고 헤헤 웃더니 꼬물꼬물 캐리어를 제 방으로 옮겼다.

“빨래부터 바로 내놔. 이번 주 당번 너잖아.”

“알았어. 참, 화단에 물 좀 먼저 주고. 며칠 너무 쨍쨍했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비가 온다는 예보를 믿고 따로 부탁하지 않았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았다. 가방을 정리하라는 말에는 꼬물대던 유비가 화단 생각에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예 나가는 김에 유선이 데리고 오든가.”

“맞다. 그럼 전화 좀 해줄래? 나 강동관부터 다녀올게.”

유선은 지난 화이트데이에 제갈량의 전폭적인 협력으로 키우게 된 강아지 이름이었다. 데리고 가기도, 맡기기도 마땅치 않아 종종 같이 산책을 다니는 손책에게 맡겨두었다.

그러니까 제일 먼저 물부터 주고, 그 다음에 유선이 그리고 다녀와서 짐 정리. 유비는 그렇게 순서를 정리하고 물뿌리개부터 찾았다.





강아지를 데리고 돌아오는데 손책이 며칠 더 맡겨도 괜찮다며 붙드는 바람에 해가 완전히 져버린 뒤에야 도원관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유선아, 대체 얼마나 예쁜 짓만 골라 했길래 손책이 저래?”

손책만이 아니라 옆에서 손권도 같이 아쉬워서 어쩔 줄을 몰라하던 걸로 봐서는 모르긴 해도 어지간히 유선을 예뻐한 모양이었다.

왈, 유선은 검은 동자가 가득한 눈으로 꼬리를 흔들며 유비에게 머리를 비벼댔다. 손책네 식구들과도 잘 지냈다면서도, 유비가 돌아와서 기쁘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 착하지. 얼른 가서 맛있는 거 줄게. 네 선물도 샀거든.”

유비는 싱글대면서 걸음을 빨리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어서 공손찬이 기다릴 것 같아서였다. 그러다 도원관에 거의 도착했을 때, 얌전히 따라오던 유선이 유비의 손에서 리드가 빠져나갈 정도로 거세게 앞서서 달려 나갔다. 유비가 당황해서 따라잡기도 전에 유선은 저만치 앞에 선 그림자에게 달려들었다.

“유선아!”

유비는 당황해서 소리를 지르며 급히 리드를 고쳐 잡으려다가 그림자가 익숙한 형태의 부채를 앞으로 내미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유선과 같이 뛰기 시작했다.

“제갈량!”

“오셨습니까.”

어두컴컴한 어둠 속에서도 유독 빛이 나는 듯한 얼굴 하나가 있다면 유비는 두 번 고민하지 않고 그게 제갈량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유비가 온 얼굴을 다해 웃고 있는 것에 비해 제갈량은 실구름에 가려진 달처럼 어슴푸레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유비는 시야가, 세상이 가득 차는 것만 같다고 느꼈다.

유선에게 손짓으로 멈추라는 신호를 한 뒤 제갈량은 유비부터 먼저 받아 안았다. 유선은 어리광을 부리는 기색조차 없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두 주인의 재회를 지켜보았다.

“헤헤, 나 다녀왔어.”

유비에게도 꼬리가 달렸다면 분명 유선 저리가라 할 정도로 흔들고 있을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순한 얼굴에 반가움과 기쁨을 띤 채로 유비는 제갈량의 어깨며 목덜미에 뺨을 비볐다.

“얼굴 보여주세요.”

제갈량이 그렇게 말을 한 뒤에야 유비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서 도장을 찍듯 입술을 콕 찍어 키스하더니 다시 눈을 접고 웃었다.

“빨리 왔네. 이틀 뒤에나 올 수 있다더니.”

오늘 볼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기에 잠시나마 도원관 근처에 선 그림자가 제갈량이리라고 바로 알아보지 못한 거였다.

“잠시 들른 겁니다. 다시 가봐야 해요.”

“어? 그럼 오늘은 안 자고 가?”

입술을 빼죽 내밀며 유비가 묻는 말에 제갈량은 손을 뻗어 정수리를 머릿결 방향대로 곱게 쓰다듬어 주었다.

“네, 오늘은 무립니다. 대신 이틀 뒤에 오면 당분간 같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러니 그때까지 할 일 다 해치워 두세요.”

“알았어. 대신 뽀뽀 한 번만 더 하고.”

발칙하도록 귀엽군. 제갈량은 주군에게 품기에 걸맞지 않은 상념을 속으로 삼키며 유비의 턱과 뺨을 감싸고 끌어당겨 느긋하게 입을 맞췄다. 고작해야 며칠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갈증에 괴로워하던 끝에 마신 물처럼 키스가 달았다. 이유도 없이 웃음이 났다.

왈.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유선의 짖는 소리에도 제갈량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유선은 눈치가 빨라 둘이 함께 있을 때 어지간한 일로는 방해하지 않았다.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아 강아지 사육법을 마스터한 제갈량의 훈련 덕도 컸다.

“아야.”

무슨 일인가 싶어 유선에게 시선을 보내기도 전에 유비의 입에서 먼저 신호가 왔다. 무언가가 유비의 이마를 툭 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무에서 뭐 떨어진 건가? …아야!”

또다시 머리 위로 작은 파편 같은 게 떨어졌다. 마른하늘에 웬 날벼락이냐는 생각을 떠올리기가 무섭게 하늘에서 후두둑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웬 소나기람?”

유비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제갈량이 머리 위로 원반 형태의 결계를 쳤다. 그 아래로 유선을 불러들인 뒤 유비에게 도원관 방향을 고갯짓해 보였다.

“오늘 비 오는 날이야?”

“아뇨, 소나기 같은 걸 세팅한 적이 없는데….”

“어어?”

옥새의 관리자인 제갈량도 짚이는 데가 없다면 그야말로 이상기후라는 소리가 된다. 눈을 깜빡이며 빠르게 도원관으로 이동하는데 더 놀랄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빗줄기와 함께 손가락 한마디만 한 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한 거였다.

빗줄기와 함께 우수수 떨어지는 우박이 바닥에 튀어 유선에게로 튀어올랐다. 유비는 잽싸게 몸을 숙여 유선을 감쌌고, 제갈량은 결계의 범위를 넓히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도원관 현관을 향해 뛰었다.

“안 그래도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 걱정하던 참이었는데 잘 데려왔어? 어, 제갈량?”

현관에서 유비를 맞아주며 공손찬이 제갈량을 보고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그렇지만 제갈량은 이맛살을 찌푸린 채로 공손찬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시스템에 이상이 생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가봐야겠어요.”

그 시스템이라는 게 옥새를 말하는 줄 알기에 유비도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공손찬만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야,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가긴 어딜 가? 자고 가.”

“정리되는 대로 다시 오겠습니다. 참, 화단에….”

거기까지 말하고는 제갈량이 얼굴을 찌푸리며 현관 밖으로 뛰쳐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뜻밖의 소리에 공손찬까지도 놀란 얼굴이 되었다. 비가 오는 줄은 알았어도 우박까지 쏟아지는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제갈량!”

“괜찮아요!”

결계로 비와 우박을 피하는 건 별일 아니지만 공손찬의 눈에 띄는 건 다른 문제였다. 유비는 제갈량의 괜찮다는 말을 오해 없이 알아듣고 혹여라도 공손찬이 따라나서지 못하게 막았다.

“야, 니 애인 우박 맞잖아! 여기 우산!”

어두워서 자세히 보이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유비는 공손찬 손에서 우산을 받아들고 자기도 급히 제갈량을 따라 나섰다. 그러고는 화단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제갈량을 보고 아차하며 화단 울타리 위로 반투명 장막을 덮었다. 나무 그늘 아래라 덜하긴 했지만, 꽃들이 우박에 맞을 수도 있어서였다.

“이게 진짜 무슨 일이야?”

장막을 다 덮자마자 유비가 당황해서 하는 말에 제갈량은 대꾸하지 않았다. 우박이 도원관 지붕 위로 쏟아지는 소리가 어찌나 시끄러운지 자기가 한 말도 잘 들리지 않았던 탓도 있다. 제갈량은 유비에게 뭐라고 하며 화단 안쪽을 가리키더니 이내 도원관 반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공손찬의 시선을 벗어난 다음에 옥새로 돌아간 듯했다.

“뭐라고 했는지 못 들었는데….”

정신없는 와중에도 갑작스런 제갈량의 퇴장에 시무룩해진 유비가 그렇게 종알거렸다. 그리고 뒤돌아서서 도원관으로 돌아가려는데 화단 구석에 놓인 낯선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어?”

그건 작고 흰 꽃망울이 이슬방울처럼 맺혀 있는 작은 화분이었다.





이틀 전 이상기후는 뉴스에서도 잠시 보도되었다. 다행히 제갈량이 잽싸게 나서준 덕에 화단은 아무런 피해 없이 지나갔다. 유비의 이마에 작은 멍 하나가 피해의 전부였다.

그리고 그간 연락이 없어 정말 큰일인가 했지만 다행히도 제갈량은 더 늦지 않게 이틀째 되던 날 점심 무렵이 한참 지나 도원관으로 찾아왔다. 저녁 시간대에든 다시 관원들이 찾아오지만 비교적 한가한 시간대여서 제갈량은 아예 밤 시간대가 아니면 이른 오후에 찾아오곤 했다.

유비는 제갈량이 오자마자 자리에 앉히고, 밥부터 먹겠느냐고 물었다. 식사를 끝내고 정리를 마친 게 뻔히 보여 제갈량은 고개를 저었다. 유비가 다시 그럼 차를 마시겠느냐고 묻자 제갈량이 부탁한다며 식탁 의자를 빼고 앉았다. 유비는 바로 주전자에 물을 올리며 준비를 하며 물었다.

“오늘 못 보나 아닌가 걱정했어. 어제 뉴스에도 나왔었다? 옥새에 문제가 있었던 거야?”

“아뇨. 별일 아니었습니다. 찬 공기가 저기압 위로 지나가면서 기온 차로… 그냥 드문 자연현상이었어요. 옥새에는 아무 이상이 없어서 예정대로 점검만 하고 온 겁니다.”

설명을 하려던 제갈량이 유비의 어리둥절함을 표정으로 빚어놓은 듯한 얼굴을 보고 말을 줄였다.

“그랬구나. 다행이다. 난 또 혹시나 옥새에 이상이 생겨서 큰일이 난 거면 어쩌나 했지.”

“옥새에 이상이 생기면 세상 전체에 문제가 발생하니까요. 자동화 시스템에도 문제가 없도록 신경쓰고 있으니 유비 님이 걱정하실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갈량의 말에 유비가 속눈썹을 파닥이듯 눈을 깜빡이더니 어? 어, 하고 어설프게 대꾸했다. 제갈량이 하는 말을 뒤늦게 이해했다는 투였다. 그 반응에 제갈량은 더 묻지 않고 유비를 지그시 바라만 보았다. 그러자 유비가 겸연쩍어하며 우물쭈물 대꾸했다.

“아니, 난 널 늦게 보게 될 것 같아서 그것만 걱정했는데….”

그 말에 이번에는 제갈량이 뜻밖이라는 얼굴을 해 보였다. 물론 곧이어 수려한 얼굴에 꽃을 피우듯 미소를 지었다. 유비는 잠시 예술 작품을 감상하듯 제갈량을 바라보았다. 와, 나 지금 진짜 행복한 것 같아 하는 생각이 파문처럼 번져나갔다.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신다면서요?”

“…어? 어어. 그야 바라지.”

“그런데 제 생각만 하신 거예요?”

짓궂은 질문이었다. 제갈량으로서는 유비가 곤란해 하며 얼굴을 붉힐 반응을 기대하고 던진 말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유비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야 네가 옥새에 있는데 별일이 생길 리가 없잖아.”

만약 유비가 아는 다른 사람의 말이었다면 남의 일이라고 쉽게도 생각하는구나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유비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만큼 제갈량은 그런 오해를 하지 않았다.

유비는 자신의 눈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고통받는 걸 무심하게 바라볼 수 있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드림 배틀이 한창 벌어지던 때, 유비는 다른 사람을 위해 제 위험을 고려하지 않고 전투에 뛰어들곤 했다. 또한 세상을 위해 자신이 희생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세상이 좌지우지될 수도 있는 커다란 문제 앞에서 별일 없을 거라고 낙관하는 건 오로지 제갈량 때문이었다. 제갈량이라는 신선에게 품는 절대적인 믿음 때문에.

“아, 물 끓네. 잠깐만 기다려.”

그렇게 말하며 유비가 불을 끄고 찻잔에 물을 붓더니 부엌을 빠져나갔다. 화장실이라도 다녀오려나 보다 하고 별 생각 않고 제갈량은 그대로 앉아 유비를 기다렸다.

솔직히 원인 파악 전까지는 정말 옥새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닌가 하고 등골이 서늘해졌었다. 만에 하나를 생각하며 떠올렸던 공포를 유비에게 샅샅이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불안했던 마음을 유비가 몰랐으면 했다. 혹시라도 만나지 못하는 날이 더 길어질까 전전긍긍했던 건 어차피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하다못해 유비가 세상에 대한 걱정만이라도 덜길 바랐다. 그게 아무리 이기적이라 하더라도.

천신만고 끝에 옥새의 자동화를 이루어낸 덕에 이렇게 제법 안정적으로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앞으로도 아주 오래도록 둘은 완전히 안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스템에 아주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세상 그 자체가 끝날 수도 있으니까. 그걸 막기 위해서 제갈량이 옥새를 떠날 수 없게 될지도 모르니까.

유비는 그런 제갈량의 마음에 언제나 넘치도록 위로가 되어 주었다. 제갈량에게 자기를 찾아와 달라는 말 대신, 유비 쪽에서도 찾아가겠다고 해주었다. 앞으로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유비 역시도 제갈량을 찾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제갈량을 위해 한계도 포기도 다 뛰어넘겠노라고 해주었다.

신선으로 태어나 바란 적 없는 꿈을 손에 넣었고, 기대할 수도 없었던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이제는 감히 꿈을 꿀 수도 없던 약속까지 얻었다. 유비는 결코 알 길이 없겠지만, 유비의 존재 자체가 제갈량에게는 세상보다 컸다.

그래서 한 번이라도 더, 조금이라도 더 웃어 주었으면 해서 늘 유비가 원하는 대로 해주자고 생각한다. 인간의 풍습을 공부해서 유비가 기뻐할 만한 꺼리를 찾는다. 이틀 전만 해도 분명 그 생각에 사로잡혀서 무리하게 잠시 내려왔다가 혼비백산해서 올라간 거였고 말이다.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도장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유비가 그 방향에서 잽싸게 들어왔다.

화장실에 다녀온 게 아니었던가 싶어 제갈량이 의아해하는데 유비가 부엌으로 들어오자마자 조심스레 찻잔에 무언가를 띄웠다. 그리고 싱글벙글하며 찻잔 두 개를 식탁 위로 날랐다.

“짜잔.”

낯설지만 어디선가 맡아본 듯한 향이 코로 먼저 전해졌다. 제갈량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비가 내미는 찻잔과 받침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찻잔 안으로 시선을 보내고서야 향기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차에 꽃을 띄웠어요?”

“음? 이러라고 준 거 아니었어?”

꽃잎으로 차를 내려 마실 수도 있다는 걸 지식으로 알고는 있었지만, 그걸 염두에 두고 선물한 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마음에 든 건 향기와 꽃말 쪽이었다. 다 피지 않은 상태로 줬으니 천천히 피는 걸 보면서 즐겨 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나는 네가 차를 잘 마시니까 이걸로 같이 티타임 갖자고 그런 줄 알았지.”

그 난리통에 옥새 걱정하면서도 건네주고 간 화분이 고작해야 같이 차 마시자는 뜻이겠어요? 그렇게 말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유비 앞에서 쏙 들어가 버렸다.

한편으로는 약간 어이가 없어졌다. 보아하니 화이트데이나 밸런타인데이에 비해서 인지도가 낮은 이벤트였던 듯도 했다. 유비는 그날이 뭐였는지, 왜 제갈량이 굳이 약속한 날짜보다 이르게 와서 화분을 놓고 갔는지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뒤늦게 제갈량은 혼자 괜히 난리를 쳤나 싶어졌다.

“꽃도 향기도 제갈량한테 너무 잘 어울려서 꼭 같이 마시고 싶었어. 아, 몸에도 좋대.”

확실히 나쁘지는 않았다. 평소 커피만 마시다 보니 차는 거의 마셔본 적이 없는데, 차 위에 작은 꽃송이 하나를 띄운 것뿐인데 향에 감싸이는 것 같았다. 코와 입을 통해 들어온 꽃향기가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내가 꽃말도 한번 찾아봤거든.”

그 말에 제갈량은 고개를 갸웃하며 찻잔에서 입술을 뗐다. 말리꽃의 꽃말이라면 자신도 알고 있다. 그게 마음에 들어서 선물한 거니까. 처음에는 로즈데이라는 단어 때문에 아예 도원관에 장미 화단을 하나 만들어놓고 갈까도 생각했지만 서서의 꽃밭과 어울리지 않는데다, 가시가 있는 꽃은 어쩐지 유비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러다 화분으로 선물하기 좋은 꽃을 살피다 선택한 게 바로 이 말리꽃이었다.

“행복, 친절, 상냥이래. 진짜 멋지지 않아?”

셋 다 유비와 너무 잘 어울렸다. 흰 꽃망울과 꽃말을 본 순간 제갈량이 두 번 고민하지 않고 화분을 집어 들어 도원관으로 왔을 정도였다.

“제갈량이랑 정말 딱이잖아.”

“저요?”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제갈량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이쪽은 유비의 이미지와 정확하게 들어맞는다고 생각해서 고른 것이었는데.

“응, 너는 정말 친절하고 상냥하고… 너랑 있으면 내가 행복하니까.”

정말로 행복하다는 듯이 가볍게 뺨을 붉히며 유비가 말갛게 웃었다.

“…역시 이벤트는 일단 챙기고 봐야….”

“응?”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멍하니 마음속의 말을 늘어놓다 제갈량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화분 고마워. 너라고 생각하고 잘 키울게. 꽃은 계속 필 테니까 내가 잘 돌봐서 또 차 끓여줄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갈량은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종알거리느라 바쁜 와중에도 유비는 제갈량의 찻잔이 비었음을 알아차렸다.

“더 줄까?”

그런데 제갈량이 그 말에 대답은 않고 유비의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뭘 하려는지 몰라 잠자코 보고 있으려니 제갈량이 유비의 손에서 뜨거운 잔을 떼어놓았다. 그리고 상체를 기울이더니 밀어를 전하듯 바짝 얼굴을 들이대고 속삭였다.

“차는 다음에요.”

향기를 머금은 입술에, 향기로 젖은 입술이 파고들었다. 초록색, 소시지, 도복, 부채, 강아지 등 두 사람으로 하여금 서로를 떠올리게끔 하는 작은 요소가 세상 이곳저곳에 흩뿌려져 있었다. 그리고 오늘 거기에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어쩌면 연애란 그런 요소가 하나씩 늘어가는 과정인 듯도 했다. 언젠가는 세상 전부가 사랑하는 사람의 흔적으로 가득 찰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제갈량의 머릿속에 언뜻 떠올랐다. 길이 아무리 험하다 하더라도 그건 정말이지 비할 데 없이 멋진 여정이 될 것 같았다.

향기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결코 놓지 않겠다는 듯 둘은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하얗고 작은 꽃의 꽃말 가운데 하나가 두 사람이 머무는 공간을 내내 가득 메웠다.









<끝>










* 말리꽃 = 아라비안 자스민

* 꼭 현생에서 이벤트 안 챙기는 닝겐들이 지 컾만 챙기고 난리인 게 접니다.

* 읽어주시는 분들, 하트 찍어주시는 분들,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 후원해 주시는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가끔 치이면 글을 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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